여자는 남자보다 오래 산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7월 공개한 'OECD 보건통계'에서도 우리나라 여자의 기대수명은 85.7년으로 남자의 79.7년에 비해 6년 길었다. 미국, 유럽 등 다른 국가들도 여자는 남자보다 평균 6-8세 더 산다. 자식,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평생 고생한 할머니들이 남편보다 오래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전자의 힘일까? 아니면 좋은 생활습관 때문일까?
◆ 남자의 질병.. “흡연-음주 등 나쁜 생활습관이 큰 영향”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장수하는 것은 유전자, 생활습관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부모로부터 장수 유전자를 이어 받은 여성이라도 수십 년 동안 과식, 운동부족 등 잘못된 생활습관을 갖고 있었다면 암 등 각종 질병으로 일찍 사망할 수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생기는 위암의 남녀 환자비율을 보자. 국가암등록통계(2019년 발표)에 의하면 위암 환자는 남자가 여자보다 2배 더 많다. 남자가 1만 9916명, 여자는 9769명이다. 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같은 식단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짜게 먹는 식성이 있다면 위암 위험이 높다. 가족 중에 위암 환자가 잇따르는 것은 유전성도 있지만 젓갈, 염장 식품 등 짠 음식을 공유하고 찌개 하나를 함께 떠먹는 문화로 인해 헬리코박터균 감염율이 높은 것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왜 남자 위암 환자가 더 많을까? 위암의 위험요인에는 흡연, 음주도 큰 몫을 차지한다. 남자의 흡연-음주율은 여자보다 더 높다는 게 각종 통계에서 확인된다. 직장 회식문화로 인해 발암물질이 생길 수 있는 탄 고기를 자주 먹는 비율도 남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남성의 수명 단축에 영향을 미친 요소로는 암뿐만 아니라 비만·고혈압·당뇨병과 같은 만성질환도 꼽을 수 있다. 모두 잘못된 생활습관이 원인인 질병들이다.
◆ 운동 안 한다? 설거지, 청소 등도 훌륭한 신체활동
장수를 위해서는 규칙적인 신체활동도 중요하다. 신체활동은 헬스, 축구 등 일반적인 ‘운동’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설거지, 청소, 정리 등 집안일도 훌륭한 신체활동이다. 헬스장에서 1시간 운동했다고 귀가 후 잘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보다 집안일을 통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게 건강에 더 좋다.
장수하는 할머니들을 보면 헬스, 구기운동은 평생 안 해봤어도 부지런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가까운 거리는 항상 걷고 틈만 나면 쓸고 닦는 등 몸을 자주 움직인다. 반면에 할아버지는 흡연, 음주 후 방에 누워 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례를 모두에게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주로 했던 집에서의 신체활동은 세계 의학기관들이 인정하는 중요한 건강효과 중의 하나이다.
◆ 역시 유전자의 힘? 성염색체가 수명에 미치는 영향
남녀의 수명은 타고난다는 주장이 많다. 암수의 성별을 결정하는 성(性)염색체가 수명의 길고 짧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같은 성염색체를 가진 암컷이 그렇지 않은 수컷보다 평균 18% 정도 오래 산다는 논문도 발표됐다. 암 발생에도 유전성이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이 남녀의 장수 유무를 가르는 유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역할 등 이와 관련된 후속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오래 살아도... 여성은 앓는 기간이 길다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아도 각종 질병으로 투병하는 기간이 길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의 자료(2020년)를 보면 2018년 출생아 기준으로 여성의 유병기간이 남성보다 5.1년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남녀의 기대수명 차이가 6.0년임을 감안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사는 기간의 대부분을 각종 질환에 시달린다고 봐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자료(2020년)에 따르면 여성농민의 근골격계 질환 유병률은 70.7%로 남성농민(55.1%)에 비해 매우 높았다. 또 소화기계질환 70.7%, 호흡기계질환 67.7%로 남성농민(각각 63%, 57.4%)보다 환자가 많았다. 주로 밭농사를 담당하는 여성농민은 쪼그려 앉거나 숙이는 동작이 많아 무릎 관절, 허리 건강에 큰 부담을 준다. 귀가 후 요리, 빨래 등 집안일도 여성농민의 몫이었다.
◆ “건강수명을 끌어 올려야 진정한 장수”
오래 살아도 질병으로 장기간 누워 지내면 장수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있었던 앞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례를 일반화할 순 없다. 맞벌이가 활성화된 현재 30-40대의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남녀의 가사 분담 등이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아도 투병기간이 길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팩트(사실)이다. 이제는 건강수명에 초점을 맞춰 여성들의 노년 건강을 끌어올리는 게 과제다. 여성농민의 근골격계 질환 문제, 도시 여성들의 근력 감소 등을 개선해야 ‘건강 장수’의 바탕이 된다. 남자들도 담배 끊고 술을 절제하는 등 생활습관을 바꾸면 더 살 수 있다.